알카사르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보니 세비야 대성당 앞 광장에서 안토니아와 크리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다고 하여 서둘러 점심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놀라웠던 건 1시쯤 만났는데 주변에 오픈한 식당들이 전부 타파스 바 밖에 없었다...
어제 타파스 바에 한번 데었던 우리라 타파스 바는 모두 거르기로 결정을 하고,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가 멕시코 음식점에 가기로 했다.
스페인에 있으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가 남미 음식점들이 많았다는 것.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타코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안토니아에게 듣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하는 것이 매우 쉽다고 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칠레와 같은 국가들에서 스페인으로 유학을 오거나 일하기 위해 건너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페인으로 이주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차린 남미 음식점들이 많다고.
아무튼 우리는 타코를 세 접시 주문해 맛있게 먹었다.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사진을 찍을 새도 없이 흡입했던 것 같다 ㅎㅎ;
점심을 먹고 안토니아는 밀린 빨래를 하러 떠났고, 나와 크리스는 둘 다 딱히 계획이 없었던지라 세비야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크리스가 말하길 무슨 박물관이 있는데 25세 이하는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일단 거기를 가보기로 했는데
도착해보니 휴일이라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각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말하고는 서로 사진을 찍어줬는데
여기서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다리가 길어 보이는 각도로 전신샷을 찍어줬다.
그런데 크리스가 자기가 사진을 찍으면 항상 다리가 너무 길어 보이게 나온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진짜 지금까지 살면서 수천 장 사진을 찍으면서 다리가 짧아 보인다고 구박을 받은 적은 있어도 다리가 너무 길어 보인다는 컴플레인을 받은 건 난생처음이라 말문이 막혔다.
근데 짜증났던건 우리가 애용하는 각도로 사진을 찍어주면 진짜 다리가 너무 길어서 무슨 팔척귀신마냥 보인다는 것...
나는 한국에선 모두가 다리가 길어보이길 원하니 조용히 하라고 말해주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는 크리스가 일종의 가이드 투어를 해줬다.
전날에 프리 가이드 투어를 받았는데, 거기서 알게 된 내용을 소개해 주겠다고..
응? 프리 가이드 투어? 그런게 있었는지도 몰라서 물어보았는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워킹 투어를 제공하고 팁을 받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가이드 투어라고 했다. 유럽의 큰 도시들에선 어렵지 않게 이런 무료 가이드 투어를 찾을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시작된 크리스 가이드 투어의 첫 번째 행선지는 알폰소 13세 호텔이었다.
크리스가 전날 왔을 때는 외관만 보고 지나쳤다고 내부에 들어가보자고 해서 들어갔다.
투숙객만 들어갈 수 있는 줄 알고 도둑마냥 조심조심 들어갔었는데, 알고 보니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ㅎㅎ;
외관만 봐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이었는데, 내부 장식도 아주 이국적이고 멋있었다.
1박에 얼마인지 궁금해 검색해보니 가장 작은 방이 대략 500유로... ㅎㅎ
다음에 세비야에 올땐 성공해서 이 호텔에 묵는 걸로 하고 열심히 눈에 담아 두었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어제 왔던 스페인 광장이었다.
해가 쨍쨍할 때 보니 오렌지 빛의 광장이 더욱 돋보이고 웅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정말 크게 받았던 느낌이 세비야라는 도시 자체의 색감이 굉장히 생생(Vivid)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말을 꺼내니 크리스가 굉장히 공감을 하면서 자신도 독일에서 지내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겨울에도 따뜻하고 맑은 날씨 때문이 아니었을까? 길거리엔 오렌지가 열려있고 말이지...
이 이후에는 사실상 가이드 투어가 아니라 무작정 걷기 여행으로 변해 과달키비르 강가를 따라 주욱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사람과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 보는 건 처음이라고 했는데, 나도 독일 사람이랑 대화를 나눠보는 게 처음이라 서로의 문화를 비교하며 이야기하는 재미가 있었다.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유럽이 한국보다 선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채식에 대한 담론, 환경 보호에 대한 담론,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 기피하고 있는 현상,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과 같은 점들...
교양수업 때 그런갑다.. 하고 들었던 내용들을 실제로 듣게 되니 좀 더 실감이 나는 것 같다는 느낌?
특히나 흥미로웠던 게 틴더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독일이나 스페인에서는 연애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보다는 틴더로 일회성 만남을 가지는 것이 굉장히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26년을 어쩔 수 없는 유교보이로 살면서 틴더에 별 관심이 없던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한국에 들어와서 보니 아마 한국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틴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기도 하고
연애에 있어서도 점점 한 사람과 아주 오래 만나거나 아니면 아예 연애를 하지 않거나로 양극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ㅎ...
그리고 군대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길래 군대 썰도 좀 풀어주고... ㅎㅎ 하다 보니 어느새 해 질 녘이 되어있었다.
메트로폴 파라솔이라는 곳으로 석양을 보러 가자고 하여 갔는데, 입장료가 10유로인가? 하길래 쿨하게 패스하고
맥주를 한 병씩 사들고 호스텔 옥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가 묵었던 호스텔 옥상에는 멋들어진 테라스가 있었는데 저 멀리 세비야 대성당을 볼 수 있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옥상에서 석양을 보며 맥주를 마시던게 세비야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이라는 숙소 후기가 있었는데, 백번 이해가 가는 전망이었다.
뭔가 내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늘은 점점 더 분홍 빛으로 물들어가고
안토니아가 다시 합류했다. 자정에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는데, 그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방에 체크인한 프랑스에서 온 프랑수아도 합류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신소재 공학 석사를 졸업하고 스위스에서 취직하게 되어 기념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무려 엔지니어 학위를 가지고 있는 엘리트였다 ㄷㄷ
이 때 내가 프랑스어 몇 마디를 했는데 아주 신기해했다 ㅎ;; 프랑스어 하는 한국인 관광객은 처음 봤다고..
putain과 merde, c'est catastrophe를 아주 파리 사람처럼 말한다고 칭찬해줬다...ㅎ ㅎ...;;
해가 넘어가니 저 멀리 세비야 대성당이 조명을 받고 빛나기 시작했다.
숙소 주인아주머니가 말해주시기를 주변에 무료로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하여 같이 보러 나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작은 공연장이었는데 외관만 봐서는 전혀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디서 듣고 사람들이 왔는지 어느새 공연장은 만석이 되었다.
공연과 함께 간단한 타파스와 주류를 파는 곳이었는데 저녁을 따로 먹지 않았던 터라 간단히 타파스 몇 개와 와인 한 잔을 시켰다.
가격대가 꽤 셌는데, 아마도 무료 공연을 하는 대신 술과 안주로 이익을 보는 곳이었던 것 같다.
역시 가격에 비해 맛은 그닥이었던 기억이 난다.
사진도 한 컷 찍어주고.. ^^
이때 어쩌다 불교 신자인 내가 군대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 세례명이 이냐시오라는 이야기를 하니 안토니아가 빵터졌다.
칠레에선 이냐시오가 아주 흔한 이름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주 이냐시오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좀 놀라운 게 얼마 후에 내 세례명을 밝힐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는데, 거기서도 내가 딱 이냐시오처럼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흠...
암튼 그렇게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아쉽게도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다.
공연 시작 전에 어떤 아저씨가 나와서 스페인어로 길게 설명을 막 했는데, 친절하게도 안토니아가 모두 통역을 해주었다.
대충
이 공연은 시에서 지원을 받아서 하는 완전 무료 공연이니까 팁은 안 줘도 된다.
다들 플라멩코가 스페인의 문화인 줄 아는데 사실은 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문화, 또 집시의 문화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게 공연은 시작되고
열정적인 플라멩코가 펼쳐졌는데,
사실 춤 자체보다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아저씨가 더 기억에 남는다. 포스부터 남달랐는데 아주 끝내주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춤을 보면서는 와 무릎 관절 다치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여기서 한 번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공연 중간 인터미션 시간이 있어 화장실에 갔는데 아뿔싸, 문이 안에서 잠겨버렸다.
난생처음 화장실에 갇혀버렸는데, 밖에서는 막 공연이 다시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휴대폰을 들고 왔던지라 안토니아에게 SOS를 쳤고 잠시 후 프랑수아가 나를 구하러 와줬다.
아무리 문고리를 잡고 돌리고 같이 몸으로 문을 밀고 당겨봐도 안 열리는지라 진짜 부시고 나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프랑수아가 문고리를 찰칵찰칵 만지더니 문이 열렸다!
역시 엔지니어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프랑수아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를 전했다.
화장실 갈 때 무조건 핸드폰을 들고 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사건...
그렇게 플라멩코 공연이 끝나고 안토니아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떠났다.
서로 한국/칠레에 오면 반드시 연락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는데 뭔가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겨우 하루 만나서 친해졌는데 ㅎㅎ
안토니아를 떠나보내고 나와 프랑수아, 크리스는 2차를 즐기러 주변의 타파스 바로 갔다.
늦은 저녁의 타파스 바는 점심과는 완전히 딴판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갔던 곳이 아마 좀 더 로컬들이 찾는 맛집 같은 분위기였는데
허리 높이까지 오는 손바닥만 한 작은 테이블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타파스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한 식당에서 메뉴 여러 개를 시키고 죽치고 앉아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네 문화와 달리
여기서는 이렇게 타파스 한 두 개 정도와 맥주 한 병을 시키고 다 먹으면 다른 가게로 가서 다른 메뉴를 시켜먹는 문화인 듯했다.
주변에도 모두 이런 타파스 바였는데, 손님이 거의 가득 차 있었는데도 자리가 매우 빠르게 났다.
우리도 타파스 세 개와 맥주 한 병씩을 시키고는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우리 셋 다 동갑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말이 아주 잘 통했다 ㅎㅎㅎ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대화 주제가 한국 친구들을 만나면 나오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ㅎ;
그렇게 두 가게 정도를 돌며 타파스를 맛본 후,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구가 알려준 루프탑 바로 가자고 했다.
세비야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의 루프탑이었는데, 히랄다 탑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나는 이미 주량 초과로 살짝 맛이 간 상태여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ㅎㅎ; 그냥 즐거웠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바의 영업시간이 끝나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종업원이 나한테 한국어로
"계산하시겠어요?"
라고 물어봤다.
나는 갑자기 훅 들어오는 한국어에 놀라서
"뭐..뭐야... 뻬르돈?"
이라고 대답했고... 혹시 한국인 직원인가 해서 얼굴을 보니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러자 종업원이 웃으면서
"저 한국어 공부하고 있어요."
라고 말해줬다.
반가운 마음에 몇 마디 나눈 후 한국어를 너무 잘한다고 칭찬해줬다 ㅎㅎ
스페인 사람 입에서 한국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계산을 끝내고 "그라시아스" 대신 "감사합니다!"로 인사를 하고 바를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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