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향하는 날.
체크아웃 시간까지 이놈의 빨래가 도통 마르지 않아서 ㅎㅎ 건조기 앞에서 막판까지 대기를 타다가 부랴부랴 체크아웃을 하고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파루에서 세비야는 기차 대신 버스로 이동했다. 내가 여행할 당시에 Flix Bus에서 프로모션을 왕창 진행했어서 버스를 아주 싼 가격(대부분 10유로 미만)으로 예약해서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유럽에서 이런 저가 버스사를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종종 버스가 출발하는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파루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도 출발 위치가 터미널이 아니라 웬 대로 한복판으로 변경이 되어 있었다.
출발 전날에 갑자기 출발위치가 변경되는 경우도 있으니 항상 앱이나 메일을 확인해서 출발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버스를 타는 게 좋다.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들고 있던 100유로짜리 지폐를 작은 단위로 바꾸기 위해 은행에 갔는데, 우리나라랑은 시스템이 다른 건지 벨을 누르고 은행 건물 바깥에서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줄에 서서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결국 버스 시간에 늦을까 중간에 뛰쳐나와서 버스를 타러 갔다. 이놈의 100유로짜리 때문에 앞으로 몇 번 고생을 하게 되는데...
아무튼 줄에서 뛰쳐나온 덕에 버스에는 늦지 않게 탈 수 있었다. 대도시로 가는 버스라 그런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만원이었다. 다행히도 맨 뒷자리에서 조금 넉넉하게 앉아 갈 수 있었는데. 옆자리에는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와 젊은 어머니가 타고 있었다. 아기를 보고 순간 너무 귀여워서 웃었는데, 아기가 너무나도 환하게 다시 웃어줬다. 아기가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웠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고렇게 버스는 3시간 반을 달려 세비야에 도착했다.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가장 크고, 스페인에서도 4번째로 큰 대도시로 그 역사가 로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도시다.
특히나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이슬람 유적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슬람 문화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터미널에 내려 숙소로 걸어오는 길에 이슬람의 향기가 나는 건물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한 후 짐을 내려놓고,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세비야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비야 대성당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알고보니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 가톨릭의 대축일 중 하나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성당에서 아주 큰 행사가 개최되고 있었다.
아뿔싸. 나는 그냥 밥 먹기 전에 성당 한 바퀴를 둘러보려고만 한 거였는데, 어느새 이 엄청난 인파 가운데 끼어버렸다.
한 10분 정도 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다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언뜻 보이기로 성모 마리아 상이 성당에서 나와 어딘가로 행진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서 성당의 반대편, 그 유명한 히랄다 탑을 볼 수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고딕 양식의 삐죽삐죽한 첨탑들 한편에 직육면체 모양의 종탑이 우뚝 솟아있다. 겉면의 장식이나 그 모양이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사실 세비야 대성당은 모스크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레콩키스타 이후 개조를 거쳐 가톨릭 성당으로 완성되었다고. 히랄다 탑도 원래는 이슬람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미나렛으로 지어진 탑인데, 이후 성당의 종탑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잘 보면 최상단의 종루와 그 아랫부분의 양식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개조를 거치는 과정에서 가톨릭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종루와 <엘 히라딜로>라는 이름의 석상을 추가했다고 한다.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이런 이슬람 시대의 유적이 굉장히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마도 그 옛날 기독교인들도 무어인들의 미적 감각과 그 가치를 인정해서 레콩키스타 이후에도 이슬람 유적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넋 놓고 감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종탑의 모든 종이 한꺼번에 울리기 시작했다.
정시도 아니었는데 울리는 것으로 봐선 아마 대축일 행사와 관련된 종인 것 같았다. 예상치 못했던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대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포르투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며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웬 마차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길거리 곳곳에 있는 푸짐한 변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유럽을 돌아다니며 마차가 다니는 장면은 종종 봤지만, 세비야만큼 많은 곳은 처음인 것 같았다.
자동차들 사이에 섞여서 마차들이 질주를 하는데, 대체 저 말똥은 어떻게 관리가 되는 걸까... 아직도 궁금한 부분.
그렇게 길을 계속 가다 보니 한쪽에서는 플라멩코 공연이 한창이었다.
세비야는 물론 나중에 그라나다에서까지 길거리 곳곳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스페인 광장 입구로 가니 마차들이 여러 대 대기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과로를 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떨구고 다리를 떨고 있었는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도착하게 되는 스페인 광장.
세비야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많이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웅장했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하는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봐왔던 유럽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슬람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생각보다 최근에 지어진 건축물인데, 1928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1929년 개최한 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에서 스페인 왕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지었다고 하는데... 보통 무언가를 과시해야 할 시기는 극도로 불안정한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2년 후 1931년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왕권을 잃고 망명하고,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그래도 광장은 넓고 아름답다.
광장 주변의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광장에는 불이 켜졌다.
광장을 감싸는 수로에 비치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스페인 광장을 둘러보고 밥을 먹으려는데,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없다.
포르투갈에서도 저녁을 늦게 시작했는데, 스페인은 더 늦었다. 저녁을 8시부터 먹기 시작하는 사람들... 8시도 이른 거고 보통 9시를 넘겨서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세상 여유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주린 배를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낮에는 꺼져있었던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야자수에 달린 크리스마스 장식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길거리 헤나샵에서 보이는 익숙한 이름들.
펄럭🇰🇷
난 솔직히 BTS가 이 정도로 인기 있는 줄 몰랐다.
거의 6년 전에 프랑스어를 정말 열심히 배웠을 때 재미 삼아 언어 교환을 했었는데, 열이면 열 모두 BTS 팬이라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었다. 그때 BTS의 성공을 예견하고 파리로 가서 굿즈샵을 열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지구 반대편의 길거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같은 방에 묵는 룸메이트...들이 돌아와 있었다.
독일에서 온 크리스와 칠레에서 온 안토니아였다. 크리스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와 석사를 하고 있다고 했고, 안토니아는 칠레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비슷한 또래라 그런지 금방 친해져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크리스가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을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한 봉지를 사 나눠 먹었다. 밤을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ㄷㄷ. 그런데 별로 맛이 없었다. 몇 개는 썩어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밤도 단 맛이 별로 없었다. 포르투갈에서 산 밤은 정말 맛있었는데...
아무튼 저녁 먹을 곳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다 숙소 근처에 있는 타파스 바에 갔다. 아시안과 스페인 음식의 퓨전 타파스를 팔았는데, 김치 크로켓이 있었다! 오 웬일~ 하면서 시켰는데, 전혀 김치 맛이 안 나는, 그냥 고춧가루 들어간 크림 크로켓이었다... 그 외에 시킨 타파스들도 전체적으로 가격 대비 맛이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사진도 없는 걸 보면 그냥 그랬나 보다.
타파스는 무조건 그라나다...
밥을 먹고는 바에 가서 칵테일을 하나씩 시키고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 안 나는데, 각 나라의 문화, 역사, 정치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놀랐던 게 칠레의 근대사나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여러모로 한국과 매우 닮아있던 기억이 난다. 강한 정치 불신, 극심한 좌우대립, 군사독재 시절의 잔재같은 것들...
음 그 외에 주식 코인 이야기도 나왔었던 것 같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끼리는 금방 친해져서 그런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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