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누나와 조카가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 시간이 오후 5시쯤이라 리스본 시내를 조금 더 돌아볼 시간이 있었다.
숙소의 식기세척기가 말썽이라 간밤에 한동안 고생을 좀 했지만 어쨌든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섰다.
체크인부터 이래저래 말썽이 많았던 리스본의 숙소...
첫째 날에는 샤워 헤드가 말썽이었고, 둘째 날에는 식기세척기가 고장 났다.
아무튼,
전날 리스본 근교 투어에서 가이드님이 말씀해주셨던, 리스본 대지진에서 살아남아 대지진 이전 리스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던 알파마 지구를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알파마지구로 가기 위해서는 코메르시우 광장을 거쳐야 했다. 리스본에서의 셋 째날이 되어서야 제대로 돌아보게 되는 코메르시우 광장.
아침에 비 소식이 있어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새벽까지 내리다가 갠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름다운 하늘과 노란색 건물이 멋스러운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지진 이전에는 이 자리에 포르투갈의 왕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지진으로 왕궁은 흔적도 없이 무너졌고, 당시 포르투갈의 왕은 지진이 다시 날까 무서워 이 자리는 광장으로 비워두고 아주다 언덕 꼭대기에 텐트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대항해시대 당시 막대한 부를 쌓았던 포르투갈에 왜 그럴듯한 왕궁이 하나 없을까 의아했었는데, 그런 이유에서였다.
광장 한편에는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밤에 오면 아주 그럴 듯 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때쯤 조카는 피로가 쌓여 아주 심기가 불편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자기 눈에는 다 똑같은 건물들밖에 안 보이는데 왜 자꾸 돌아다니느냐고 불평을 하는 조카였다.
지친 조카와 누나는 저 트리 아래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나는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조금 더 먼발치에서 본 코메르시우 광장.
리스본 대지진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주제 1세의 기마상이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는 바다...처럼 보이는 테주 강이 흐르고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알파마 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파마 지구는 28번 트램을 타면 편하게 올라가 볼 수 있는데, 아침 일찍 간 덕에 낑겨 타지 않고 여유롭게 트램에 앉아 언덕을 오르며 알파마 지구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리스본 대지진 이후 재건되는 과정에서 길이 반듯하게 정비된 리스본의 다른 곳들과 달리, 알파마 지구는 대지진 당시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아 대지진 이전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트램이 정말 가파른 언덕길을 굽이굽이 오르는데, 옆으로는 그 좁은 길로 또 승용차가 지나다니고, 그 옆으로는 정말 한 사람이 서면 꽉 차는 인도로 사람들까지 지나다니고 있었다. 어느 하나는 낑기는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언덕길을 올라 우리는 알파마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보정이 좀 빡세긴 하지만..ㅎ 대충 그때 내가 내려다보았던 알파마 지구는 이런 느낌이었다...
언덕을 빼곡하게 매운 아기자기한 집들이 리스본만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보정이 빠진 알파마 지구의 모습...ㅎㅎ...
전망대에서 알파마지구의 전경을 주욱 둘러본 후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했다.
이때 날씨가 좀 변덕을 부려 햇빛이 쨍쨍하던 것이 갑자기 안개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기념품 쇼핑 등등해야 할 일이 많아 우리는 알파마 지구를 떠나 다시 숙소로 향했다.
내려올 때에는 트램을 타지 않고 걸어 내려왔는데, 알파마 지구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 사이사이의 골목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숙소가 있던 호시우 광장 근처와는 전혀 다른 리스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암튼 그렇게 포르투갈에서 유명하다는 뭐시기 비누를 구입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숙소에 들려 짐을 찾았다.
누나는 조카와 함께 파리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떠났고, 나는 코메르시우 광장 근처로 숙소를 옮겼다.
숙소에 체크인 한 후 리스본을 좀 더 둘러보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저녁에 전날 투어에서 만난 분들과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여 그전까지 열심히 리스본을 둘러보아야 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중 발견한 엘리베이터. 워낙에 언덕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곳곳에 이런 엘리베이터와 푸니쿨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건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라고 했는데, 이것도 에펠의 제자가 만든 작품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누나가 떠난 후 비아쳄 카드 1일권을 산지라 공짜로 타 볼 수 있었지만, 굳이? 라는 생각에 타지는 않았다...
가이드님이 말씀하시기도 굳이 시간 써서 타볼만한 엘리베이터는 아니고, 꼭대기에 전망대가 멋있기는 하지만 거긴 카르모 수녀원에서 가는 것이 시간도 아끼고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생각난 김에 카르모 수녀원에 가기로 했다.
1755년 11월 1일, 가톨릭의 축일 중 하나인 모든 성인 대축일 아침, 유럽에서 가장 독실한 도시로 손꼽혔던 리스본은 대지진으로 전 도시가 초토화된다. 대축일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천대받던 집시, 무슬림, 매춘부 등이 모여 살았던 알파마지구에 살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당대 신학자들은 이 초유의 대재앙이 의미하는 바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강력한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계몽주의가 힘을 얻게 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카르모 수녀원은 당시 무너졌던 수많은 교회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무너진 천장을 복구하지 않고 폐허로 남아있는 곳이다.
이제는 높고 으리으리한 석조 건축 대신 푸르른 하늘이 수녀원의 천장이 되어주고 있었다.
내부 한켠에는 고고학 박물관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수녀원과 박물관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계획 없이 문득 간 곳이었는데 리스본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 중 하나였다.
무너진 수녀원을 복구하지 않은 것은 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다시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만나게되는 리스본의 정겨운 풍경들이 보였다.
유럽의 길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렇게 작은 발코니마다 꽃이 한가득 피어있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참 헤메이던 중 가파른 언덕 밑에서 푸니쿨라가 한 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트램처럼 긴 노선을 따라 운행하는 것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처럼 언덕 위와 아래를 이어주는 전차라고 했다.
알고 보니 어젯밤에 지나오며 봤던 헤스타우라도레스 광장까지 내려가는 푸니쿨라였다.
비아쳄 카드로 무료로 탈 수 있다고 하니 내려갈 때는 이걸 타고 가는 걸로.
푸니쿨라 바로 옆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유명한 알칸타라 전망대가 있다.
너무 오래 떠돌아다니느라 지쳐서 전망대 앞의 공원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지면서 반대편으로 보이는 언덕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누나와 조카 없이 혼자서 자유롭게 다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들떴었는데, 이런 풍경을 보니 갑자기 외로운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주변에 커플이 너무...ㅎ... 많아서... ㅎ...
한참을 멍 때리며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손자손녀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대가족이 여행을 온 것 같았는데, 모로코에서 왔다고 했다.
한국인의 혼을 담아 여러 컷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전망대를 떠나 푸니쿨라를 타러 갔다.
역시나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이놈의 전차...
비아쳄 카드가 없었더라면 절대 타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앉아 가니 좋긴 했다.
밖으로는 이 급경사를 별거 아니라는 듯이 걸어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리 근육 하나는 남부럽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웬만큼 둘러본 것 같았는데, 아직도 저녁 약속시간 까지는 시간이 꽤나 남아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쉬기에는 또 리스본에서의 시간이 아까운,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를 가진 나...
다시 열심히 발을 움직여 코메르시우 광장쪽으로 향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던지라 아까 봤던 트리가 켜진 모습을 보기 위해...
밤이 되고 길거리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켜지니 커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불편...
다시 코메르시우 광장에 도착하니 트리의 화려한 불빛이 나를 반겨주었다.
낮의 코메르시우 광장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크리스마스의 리스본.
예년에 비해 많이 소박해진 장식이라고 했다.
트리 아래로 들어가 볼 수도 있었는데, 요런 느낌
낮에 봤던 개선문도 밤에 보니 더 으리으리해 보였다.
이쯤에서 아이폰 13 프로의 야간사진모드에 엄청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큰 화면으로 보니 또 그렇게 좋은 것 같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약속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아, 강변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갈 셈으로 테주 강변으로 가는데 횡단보도에 이런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몇 십만 번쯤 리셋된 월드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테주 강변으로 가니 유럽 어디서나 맡을 수 있는 익숙한 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로 대마초 냄새...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대마 그림이 붙은 가게들이 많아서 포르투갈은 대마가 합법인가? 생각했었는데, 합법은 아니고 비범죄화되었다고. 호스텔에서 만난 직원이 이야기해 주었는데 포르투갈은 종류에 상관없이 마약의 소지와 사용으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마약의 판매는 여전히 불법으로, 대로변에 있는 대마 그림이 붙은 가게들에서 파는 것은 모두 대마 기념품... 이라고 한다.
그렇게 테주 강변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메뉴는 한국식 삼겹살구이...
포르투갈에 왔으니 포르투갈 음식을 실컷 먹고 가겠다고 생각했건만
어쩌다 한국 음식을 또 먹으니 입에 착 달라붙는 게 역시 한국인의 피를 속일 수는 없었다.
거의 흡입하다시피 음식을 먹고 여행 이야기를 나누느라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해 남은 사진은 없다.. ㅎㅎ
그렇게 저녁을 먹고 길거리를 걸어 내려오다 일행 분 중 한 분이 포르투갈의 전통 술 진자를 먹어봤냐고 하시며, 갑자기 진자를 마시러 가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전통 체리 술이었는데, 저렇게 한 잔씩 따로 파는 아주 독한 술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이야기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항상 금방 친해지게 되는데, 거기다가 이역만리 유럽에서, 코시국에, 한국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니 정말 빠르게 친해졌다.
원래 다음날 아침 일찍 라고스로 떠나야 하는 일정이라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려고 했는데, 어찌저찌 진자를 다 마시고 재즈바까지 가기로 했다...
우버를 불러 타고는 재즈바에 도착해서 입장을 하려는데, 아뿔싸 코로나 때문에 이러한 실내 공연장의 경우 PCR 음성 증명서가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쫓겨나는 우리...
아쉬운 대로 옆에 있는 칵테일 바의 테라스에 앉았다.
이때 여행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두 분 모두 아주 멋진 여행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나도 열과 성을 다해 재미있는 여행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는데, 저 칵테일은 생각보다 더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ㅎ..ㅎ... 이번 유럽 여행에서 먹었던 칵테일들은 전부 별로였으...
그렇게 우리는 거진 새벽 1시까지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고, 나는 다음날 늦게 일어나 거의 라고스행 버스를 놓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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