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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미리 예약해둔 리스본 근교 투어로 일정이 꽉 찬 하루였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저녁 늦게 끝나는지라 역시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하는 우리.
준비를 끝내고 약속장소인 호시우 광장 맥도날드 앞으로 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벤츠 밴을 끌고 투어 가이드님이 나타나셨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밴에 올라 조금 기다리니 투어에 참여한 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에서 한국 분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투어객을 모두 태운 밴은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를 향해 달려갔다.
첫 번째 목적지는 헤갈레이라 저택.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드님이 포르투갈의 문화, 리스본과 신트라의 역사, 헤갈레이라 저택의 배경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해주시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투어는 처음이라 조금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신트라에 도착하자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이 보였다. 레콩키스타 이전, 포르투갈에도 무어인들이 정착하여 살았었는데, 그때 지어진 이슬람 건축물의 양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헤갈레이라 저택.
가이드님이 말씀하시길 이곳은 아주 많은 돈을 상속받은 한량이 자신의 취향을 가득 반영해 지은 별장이라고 한다. 이름은 까먹었다... 암튼 이 한량은 단테의 신곡에 아주 푹 빠져서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그대로 지상에 구현하기를 바랐다고.
저택 곳곳에 이렇게 기괴한 모양의 암석 동굴들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자연 동굴이 아니고 시멘트와 돌을 조각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장식물이라고 했다. 신곡에서 단테는 숲 속을 헤매다 지옥의 입구를 만나게 되는데, 지옥에 이르는 으스스한 길을 만들고자 이러한 인공 동굴들을 정원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정말 놀랐던 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동굴과 물줄기는 모두 이어져있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총 9층으로 묘사된다. 이 우물은 그 9층의 지옥을 형상화하고자 만든 구조물이지만... 만들다 보니 자신의 생각대로 안 나와서 버리고 새로운 지옥을 팠다고 한다. 완성된 9층의 지옥은 잠시 후에 볼 수 있었다.
저택의 주인은 열성적인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저택에도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상징들, 의식을 위한 제단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이드님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오 조각... 오 건물... 오 장식... 이러고 지나갈 뻔했는데 그러한 배경을 듣고 정원을 둘러보니 한층 더 흥미로웠다.
그렇게 정원을 계속 둘러보다 웬 바위 앞에 멈추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9층 지옥의 입구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정도로 꽁꽁 숨겨두었다.
그리고 내려다보이는 지옥. 실제로 9층은 아니지만, 나선형으로 계단을 파고 창문을 비스듬히 배치해 마치 9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상상했던 지옥은 이런 모양이었을까..?
아래에서 내려다보니 으스스한 것이 그럴듯하다.
지옥의 바닥에서 정원 곳곳으로 이어지는 동굴로 들어갈 수 있다. 모두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로, 자세히 보면 시멘트로 자연 동굴처럼 장식해놓은 흔적들이 보인다.
이곳으로 오며 보았던 여러 수로들, 동굴들로 이어지는 길이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진짜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해서, 뭔가 지옥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아까 보았던 미완성 지옥의 바닥으로도 가볼 수 있었다.
인공으로 만든 동굴이지만, 실제 동굴과 환경이 매우 흡사해 저택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시기에는 박쥐가 살기도 했다고 가이드님께서 설명해주셨는데, 동굴을 탐험하던 중 실제로 박쥐를 만났다;;
정원을 다 둘러보고 이제 저택을 구경하러 갔다. 외벽을 보면 깨진 돌들을 쌓아올려 만든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페인트로 선들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취향 한번 독특한 주인장이 아닐까...
창문과 외벽의 장식은 어제 벨렘지구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보았던 마누엘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기이하고 신비로웠던 정원에 비해 저택 자체는 심심한 느낌이었던 기억이 난다. 음 저택이군... 이라는 감상평과 함께 우리는 다음 코스로 떠났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어느 와이너리. 이 곳에서 포르투갈의 와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프랑스나 이태리 못지 않게 품질 높은 와인을 생산하는 국가인데, 자국 내에서 생산량의 90% 가량을 소비한다고 한다. 때문에 포르투갈 밖에서는 포르투갈의 좋은 와인이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우리가 그저께 머물렀던 포르투의 도루 강 유역이 아주 유명한 와인 산지라고 했다. 그 유명한 포트와인이 포르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이라는 사실을 이 날 처음 알았다. 그 밖에도 그린 와인이 다 익지 않은 포도로 만들어지는 와인이라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고... 와인의 코르크에 따라 품질을 가늠해 보는 팁도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짧지만 알찼던 와이너리 투어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시음해볼 수 있었는데, 정말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한가로웠던 와이너리의 풍경
시음한 와인은 별도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가격대에 비해 훌륭한 와인이었다.
그렇게 와인 시음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바닷가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우리를 맞아주는 대서양의 거친 파도.
처음 마주하는 겨울의 대서양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정말 숨막히는 광경이었다... 벅차오른다는 표현이 단박에 이해가는 순간.
넋을 놓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기쁘게도 우리가 안내받은 자리에서 이 멋진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점심 메뉴는 새우 리조또와 매운 해물 크림파스타와 이름이 기억 안나는 대구 살을 감자튀김과 버무린 요리였다. 메뉴가 모두 맛있었지만 특히 저 새우 리조또는 진짜 환상의 맛이었다. 아직도 그 감칠맛이 생생한 느낌. 포르투갈에서 먹은 밥요리는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깐 걸으며 소화도 시킬 겸 근처에 있는 Azenhas do Mar라는 마을로 향했다. 절벽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저기 사는 사람들은 겨울에 참 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정말 미친듯이 불었던 기억이...
어쨌거나 아름다웠던 풍경. 날씨가 맑아서 참 좋았다.
근처 절벽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 잠깐 걷고, 다음 목적지인 신트라 페나성을 향해 떠났다.
페나성은 19세기 포르투갈의 국왕 페르난두 2세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지은 궁전이라고 한다. 다 좋은데, 산꼭대기에 지어놨다.
페나 성의 입구에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범상치않은 모양의 성이 나타난다. 언덕길을 올라가던 도중 가이드님께서 약간은 호달달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 곳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은 강력범죄자들이라고 ㄷㄷㄷ. 형기를 거의 마치고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는 포르투갈의 수감자들은 국립공원의 관리 등 육체적으로 힘든 곳에서 근로를 하면서 사회 적응 훈련을 한다고 했다. 자신의 남편과 친하게 지냈던 정원 관리인이 알고보니 살인죄로 복역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ㄷㄷ.
암튼 페르난두 2세는 자신의 부인을 위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모두 모아놓은 궁전을 지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건물 자체도 이런 저런 건축 양식이 마구 뒤섞여있다. 한쪽에는 포르투갈의 아줄레주가 장식되어 있는 가톨릭 양식의 건물이 있는데, 바로 옆에는 알함브라 궁전을 모티브로 만든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 붙어있다.
그리고 외벽은 아주 선명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구경을 하다 보니 뭔가 롯데월드나 에버랜드가 떠오르는 성이었다. 아마 페나성에서 모티브를 얻지 않았을런지...? ㅎㅎ;
산꼭대기에 성이 있다보니 밖으로는 넓은 평야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왜 이렇게 높은데다 성을 지어놓고 사나 했는데, 이 풍경을 보니 이해가 될 법 했다.
문제는 이렇게 높은데다 성을 짓으라 산을 오르락 내리락 했을 노동자들의 것이었겠지만.
실제로 얼마 안가 포르투갈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고...ㅎㅎ
한쪽에는 성벽이 있었는데, 이 성은 무어인들이 만들어 놓은 성이라고 했다.
내부에는 이렇게 이슬람 양식의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공간이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본따 만들었다고 했는데, 얼마 후 알함브라 궁전에 가서 원본을 보았더니 이건 수수한 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설정컷도 하나 찍고 ㅎㅎ
날씨가 정말 다했던 페나성.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페나성을 둘러보고 일몰을 보러 유럽의 최서단, 호카곶으로 향했다.
유럽은 겨울에 4시 반쯤이 되면 해가 지는 탓에, 호카곶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비석이 서있는 절벽쪽으로 다가가자, 숨막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유럽의 최서단,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저 바다 너머로 태양이 지고있었다.
일몰이 뭐 일몰이지라는 생각으로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정말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마치 바다가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몰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이드님이 포트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셨다.
지는 해, 그리고 달고 진한 와인.
아쉽게도 먼 바다에 구름이 껴서 해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해는 구름 아래로 들어가고
나와 조카는 이런 사진도 찍었다.
해가 넘어가니 보이기 시작하는 주변의 풍경들.
저 비석에는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의 시구절이 적혀있다.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어느새 하늘은 이런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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