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나쁜 습관
나에게는 아주 나쁜 습관이 하나 있는데 바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별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저녁에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들을 노래 같은 사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별의별 조건을 다 따지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데, 정작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 될 선택을 할 때에는 별 고민 없이, 느낌이 가는 대로 선택을 해버리는 것이다.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일, 국제협력직무로 인턴을 한 일,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일이 그랬다. 아무튼 이번 여행도 생각이 많아져가는 10월의 어느 새벽, 충동적으로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가격대의 비행기 티켓이었고, 몇 달간 방 안에서 칩거생활을 하며 쌓인 통장의 잔고가 나에게 아주 진한 유혹의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홀린 듯이 결제 버튼을 누르고야 만 것이다.(나중에 대참사가 일어남)
1) 2021년 11월 23일
거의 5년 만에 도착한 인천공항은 내 기억보다 훨씬 한산하고 고요했다. 당시 해외 입국자 격리가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을 대상으로는 면제가 되면서 슬슬 해외여행객들이 다시 한국을 떠나던 시기였는데, 생각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체크인을 한 후 느긋하게 탑승장으로 향했다. 탑승장도 역시 텅텅 비어있었던 건 마찬가지.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었건만, 마음이 그다지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번 여행은 한국에서 내가 해야만 했던 일들을 거의 내팽개치고 떠나는 도피성 여행이었으니까. 여행을 간다는 사실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도,
'내가 미쳤나? 진짜 이걸 간다고? 이 시기에? 제정신인가?'라는 생각과
'3년간 정말 많이 고생했잖아. 이제 한동안 이런 여행은 정말 없을 거야. 3년 간 내린 결정 중 최고의 선택이 될 거야.'라는 생각이 교차하며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비행기는 탑승구에 도착했고, 나는 혼란한 마음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탑승한 비행기는 역시 한산했다. 말로만 듣던 눕코노미를 실제로 보다니. 내 옆자리는 물론 내 뒷열까지 모두 비어있었고, 덕분에 누워서 갈 수 있었다. 내가 눕코노미의 쾌적함에 감탄하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할 준비를 마쳤고, 이내 활주로를 따라 질주했다. 5년 만에 느껴보는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앞으로 11시간을 비행기, 45분을 뮌헨 공항에서, 다시 2시간을 비행기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막막하면서도 동시에 진짜 내가 여행이라는 것을 떠나는구나, 하는 설렘이 크게 다가왔다.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는데, 조금은 난해하면서도 익숙한 조합의 메뉴가 나왔다. 크림파스타에... 고추장...? 루프트한자까지 로제 신드롬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크림파스타를 한 입 먹자마자 고추장을 준 이유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저히 한국사람이 참고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었던 것. 루프트한자의 기내식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코로나 시국까지 겹친지라 별로 기대하지 않았건만 정말 심각한 맛의 크림파스타였다. 평소 고추장 로제 소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추장을 조금 넣고 비볐다. 그제야 먹을만한 음식이 되어버린 로제파스타를 보며 고추장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누워서 가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11시간 내내 멍한 상태로 있다가 뮌헨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2시간 전에 샌드위치를 줬는데 거짓말 안 하고 내가 살면서 먹어본 샌드위치 중 최악이었음.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나는 루프트한자의 부적절한 기내식에 대해 완전히 용서했지만... 그래도 기내식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독일인들은 정말 이 기내식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솔직히 뮌헨에 도착하면서 살짝 긴장했었는데, 환승시간이 45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입국심사에서 잘못 걸리면 고대로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뛸 생각을 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생각보다 너무 스무스하게 입국심사를 통과해버리는 나... 심지어 백신 접종 증명서도 보여달라고 안 했다.
덕분에 시간이 좀 남아 뮌헨 공항을 잠깐 구경할 수 있었는데 충격적이게도 카페테리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광경과 절반은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기상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비행기 탑승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다시 뮌헨에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뮌헨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유럽에서는 전반적으로 코로나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인 듯했다. 앞자리에서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정말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침을 하는데 부모는 마스크를 씌울 생각도 안 하고 승무원도 별 제지를 안 했다. 차마 컴플레인을 걸진 못하고 마스크 끈을 머리 뒤로 고정시켜서 마스크를 얼굴에 밀착시켰다. 옆사람들도 별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비정상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이는 여행 내내 이어지는 생각이었음)
그렇게 불안한 2시간을 보내고, 비행기는 어느새 샤를드골에 도착했다. 저녁 즈음에 도착했는데 내가 기억하던 샤를드골보다는 훨씬 한산했다. 이네들이 아무리 코로나에 둔감하다 한들, 여기가 빛의 도시 파리라고 한들, 판데믹의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었겠지. 놀라운점은 샤를드골에 내리자마자 5년 전 느꼈던 그 냄새가 그대로 났다는 것이다. 파리는 오만가지의 향수 냄새, 오븐 안에서 바게트가 익어가며 나는 빵의 냄새와 크루아상이 구워지며 나는 진한 버터 냄새, 오물이 가득한 길거리의 지린내, 아랍과 아프리카의 향신료 냄새 같은 것들이 섞여 형용할 수 없는 냄새를 만들어 내는데, 샤를드골에서 부터 그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짐을 찾고 나오니 매형과 조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공항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낯익은 프랑스어. 비로소 내가 파리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한 나는 누나가 차려준 밥을 먹고 바로 쓰러져 잠에 들었다. 여기서 나는 잠에 들기 직전 다짐을 하나 하는데, 그것은 한국에서의 모든 걱정을 잊고 온 힘을 다해 여행을 즐기자는 다짐이었다. 물론 나의 모든 다짐들이 그렇듯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다. 이번 여행 역시 나쁜 습관에 기반한, 생각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들은 모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건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 오히려 이번 여행은 정말로 내가 올해 내린 선택 중 가장 현명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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